활명수가 옛날 궁중에서 임금이 마시던 소화제였다는 것 쯤은 다들 아실텐데요. 그외에도 활명수에는 놀라운 역사적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때는 1910년.. 우리는 일본에 국권과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경술국치입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울화통이 치밀었던 이 시기에 조금이나마 국민들의 위안이 됐던 '생명수'가 있었는데요. 바로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이름의 소화제 '활명수' 입니다.
당시 '활명수'는 단순히 속을 풀어줄 뿐만 아니라 진짜 '생명'을 살리는 생명수였는데요.
조선 후기에는 탕약이 전부였던 시절이라, 약이라는 것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급체만으로도 목숨을 잃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그러던 중 1897년, 민병호 선생이 최초의 국산 소화제인 '활명수'를 개발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물이라는 그 뜻처럼, 활명수는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또한 활명수는 단순 소화제 역할뿐만 아니라, '나라 잃은 민족의 아픔'을 풀어주는 약이었습니다.
활명수의 판매 수익이 곧 독립운동의 자금줄이었기 때문입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동화당약방을 운영하며 '활명수'를 팔았던 민강 선생은 동화당약방을 운영하기 전부터 대동청년단을 결성하고 3.1운동에도 참여했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민강 사장은 활명수(活命水)를 개발한 궁중 선전관 민병호 선생의 아들인데요. 당시 궁중에서 쓰이는 생약 비방을 서양의학과 접목해 탄생한 활명수는 우리나라 제약사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체계화된 독립운동의 필요에 따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섭니다.
이후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가 사이 연락을 담당하는 비밀단체가 태동하는데요.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 연통부'(聯通府) 입니다.
바로 '부채표 까스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약품의 전신인 동화약방 창업자 민강 선생이 임시정부와의 연락책을 맡으면서 자신의 약방을 서울 연통부 사무실로 사용한 것입니다.
동화약방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할 뿐만 아니라, 한국의 독립운동가들과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어주는 연락사무소였습니다.
진작부터 독립운동을 해온 민강 선생은 서울 연통부 총책임자로 활동하는 동시에 활명수를 팔아 얻은 수익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댑니다.
당시만 해도 급체, 토사곽란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아 활명수가 이름 그대로 '생명을 살리는 물' 대접을 받으며 인기를 끌었는데, 이렇게 벌어들인 돈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흘러들어간 것이죠.
일제의 감시로 돈을 전달하기 어려울 때는 활명수를 직접 중국으로 보내 팔아서 쓰도록 했습니다.
1920년대 활명수 한 병 값은 50전으로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한 말을 살 수 있는 비싼 가격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으로 갈 때 돈 대신 활명수를 가지고 가 현지에서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후 민강 선생은 임시정부에 발송할 비밀문서를 목판에 새기다 일본 경찰에 발각됐고 체포된 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약방 운영이 어려워졌지만, 독립운동지원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동화약방을 다시 운영한 사람들이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입니다.
활명수는 1960년대 탄산을 추가한 '까스활명수'로 리뉴얼돼 올해 출시 120주년을 맞습니다.
약이 귀한 시절, 민중의 아픈 속 뿐만 아니라 나라를 잃은 답답함까지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던 활명수, 가장 오래된 영약으로 1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민 소화제로 사랑 받고 있는데는 이런 활명수의 역사가 숨어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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